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실크로드의 종착지, 신라 경주에서 발견된 다채로운 서역 보물들의 비밀을 파헤친다. 유리구슬, 황금 보검 등 페르시아와 로마의 숨결이 깃든 유물들을 통해 천 년 전 신라인들의 개방성과 국제적 감각을 재조명하는 역사 교양 칼럼이다.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 대릉원 고분군을 거닐다 보면, 발밑의 흙먼지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문명의 숨결이 느껴진다. 무덤 속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 유물들 사이에는, 한반도에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이국적인 보물들이 다수 섞여 있다. 푸른빛을 발하는 정교한 유리잔부터 낯선 문양이 새겨진 황금 보검까지, 이들은 모두 수만 리 떨어진 서역에서 험난한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고대 신라는 단순히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다. 거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을 넘어온 이국적인 물품들은 당시 신라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종착지이자, 세계적인 국제 도시였음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화려한 유물 속에 감춰진 고대 동서양 교류의 찬란한 흔적을 추적해 본다.
모래바람을 뚫고 온 경주의 로마 유리잔
지중해의 푸른빛을 품은 신라의 무덤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굵직한 신라 고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놀라운 유물 중 하나는 바로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로마-비잔틴 양식의 유리그릇이다. 당시 한반도의 기술로는 이처럼 투명하고 정교한 유리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다. 이 푸른빛의 유리잔들은 멀리 지중해 연안이나 페르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져 실크로드의 험난한 육로나 뱃길을 통해 신라 귀족들의 손에 쥐어졌다.
발굴된 유리잔 표면에 장식된 거북등 무늬나 파도 무늬 등은 전형적인 4~5세기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 공예 기법을 띠고 있다.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생산된 진귀한 사치품들이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을 지나 몽골, 중국을 거쳐 신라의 수도 서라벌까지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물증이다.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된 서역의 사치품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의 특성을 고려할 때, 수만 리 길을 온전하게 운반해 오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는 대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이 이국적인 유리잔을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사실은, 서역의 물품이 단순한 진기함을 넘어 당대 최고위층의 권력과 막대한 부를 과시하는 절대적인 상징물이었음을 시사한다.
금이나 은보다도 구하기 힘들었던 이국적인 푸른빛의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며, 신라 귀족들은 먼 이국의 낯선 문명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채웠을 것이다. 무덤 부장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 지배층이 얼마나 폭넓은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흔적, 계림로 보검과 무인상
신라의 흙에서 나온 동유럽의 황금 보검
경주 미추왕릉 지구에 위치한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황금 보검은 신라 무덤에서 나온 가장 이질적이고 매혹적인 유물로 손꼽힌다. 붉은 석류석이 촘촘히 박힌 화려한 금빛 장식은 전형적인 켈트족이나 흑해 연안, 동유럽 초원 지대의 기마 민족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른바 켈트 양식의 특징을 지닌 장식 보검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신라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보검은 신라의 장인이 모방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서역의 누군가가 신라 왕실에 진상했거나 활발한 국제 교역을 통해 유입된 명백한 수입품이다. 학자들은 이 검이 카자흐스탄이나 흑해 연안에서 제작되어 실크로드를 호령하던 소그드인 상인들의 손을 거쳐 신라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괘릉을 지키는 서역인 무인석의 비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널리 알려진 괘릉(원성왕릉) 입구에는 더욱 직접적인 서역의 흔적이 늠름하게 서 있다. 왕릉을 호위하는 무인석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깊게 파인 눈매, 툭 불거진 매부리코, 덥수룩한 턱수염을 가진 전형적인 아라비아계 서역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장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서역 상인들이나 용병들이 단순히 물건을 팔고 떠난 이방인이 아니라, 신라 사회 깊숙이 정착하여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거나 왕실의 호위병 역할을 직접 수행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천 년 전 서라벌의 저잣거리에는 서역에서 온 이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이국적이고 활기찬 풍경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초원길과 바닷길이 만나는 문명의 종착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글로벌 네트워크
신라의 국제적 교류는 단순히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광활한 초원길을 따라 유목 민족들과 문화를 교류했고, 남쪽으로는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심지어 이슬람 제국의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직접적인 교역망을 형성했다. 아랍의 역사서에 신라가 살기 좋은 이상향으로 묘사된 것 역시 이러한 해상 교류의 결과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 무역의 패권을 쥐기 이전부터, 신라는 이미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글로벌 네트워크의 한 축을 묵묵히 담당하고 있었다. 거대한 모래사막과 성난 파도는 문명 간의 교류를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연결하는 활기찬 교역로로 기능했다.
실크로드가 신라 문화에 미친 융합적 가치
서역에서 유입된 다양한 문화와 문물들은 신라의 고유한 토착 문화와 맹목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아름답게 융합되었다. 서양의 화려한 세공 기술인 누금 기법 등은 신라 장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훗날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신라 황금 문화가 만개하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이국적인 것을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예술과 제도로 승화시킨 신라인들의 열린 세계관이야말로,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왕국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문화적 원동력이었다.
천 년 전 모래바람과 거친 파도를 뚫고 서라벌에 도착한 서역의 보물들은, 신라가 좁은 한반도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활짝 문을 열어둔 진취적인 해양 국가였음을 일깨워 준다. 나와 다른 낯선 문화를 두려워하거나 맹목적으로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인들의 포용력은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급변하는 디지털 기술과 새로운 문화적 물결 속에서 매일같이 낯선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 5070 시니어 세대에게, 천 년 전 신라인들의 당당하고 유연한 태도는 훌륭한 삶의 본보기가 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지혜롭게 수용할 때, 우리의 삶은 경주 무덤 속에서 빛나는 서역의 황금 보검처럼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넉넉함과 다채로움으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